근원과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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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렸을 적 가스버너가 켜지는 소리와 비알레띠 커피 주전자가 끓는 소리, 커피 머신에서 원두가 갈리는 소리에 잠을 깬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곱게 갈린 커피 가루는 아침을 시작하는 마법의 가루였다. 이탈리아 가정에서 자란 이들에게 에스프레소와 함께 하는 요란한 아침(그리고 오후와 저녁)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할머니 집, 친척들로 꽉 찬 주방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이탈리아 문화가 짙은 어릴 적 기억 때문에 나는 내가 뼈속까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느낀다. 나는 칼라브리아 혈통과 갈색 눈동자, 시칠리아인의 피부, 이탈리아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지중해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의 조부모는 2차대전 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북미로 떠날 당시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후 수십 년간 유럽과 아시아에서 온 이주자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광활한 캐나다 땅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하며 오늘날 다문화 사회를 형성했다. 씨앗은 내가 사는 공동체를 비롯하여 수많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바다를 건너온 문화와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나와 같은 이민 일세대의 딸과 아들, 손주들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들의 말과 행동, 음식, 삶에서는 여전히 앞선 세대의 흔적이 발견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개인적 경험에 따라 세상을 느끼고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 모닝커피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감각은 출신과 성장환경을 반영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의 뿌리는 우리가 성장한 곳과 우리를 길러준 가족을 넘어 존재한다. 특히 이주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태어난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은 여러 국가나 대륙에 걸쳐 자라거나 멀리 떨어진 조국을 마음에 품고 성장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훨씬 어려워진다. 명확하지 않은 출생 배경을 가진 사람, 지역 언어를 읽진 못하고 말할 줄만 아는 사람, 옆집 이주민 가정은 발음하지 못하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 이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생김새와 여권, 욕을 할 때 가장 편한 언어와 같은 여러 요소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된다.

우리가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에 관한 명백한 흔적이 없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문화를 자신의 문화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가 그러한 정체성의 휘장을 두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언어, 생활양식, 지리, 족보, 아니면 요리? 누가 이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과 타인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일련의 기준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우리는 무질서하게 살고 있다. 뿌리가 불명확한 이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는 다른 이들에 의한 검증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쯤에는 나는 관계와 관련해 주로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을 쓰고자 한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우리는 집처럼 편안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저 알고 있다.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이를 느끼고 감지하고 듣고 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방 안을 둘러보면 추억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떠한 단어들은 제2, 제3의 언어보다 수월하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고유한 언어적 배경에서 주고받는 대화로부터 습득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억보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풍경과 공기, 냄새를 편안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들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각자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고 우리로 하여금 근원으로 되돌아가게끔 잡아당기는 끈과 같다.

문화유산과 사려 깊은 관광에 관한 이사벨라의 글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www.museandwander.co.uk.